2026년 추수감사주일 성가해설
2026년 11월 8일
336장 하늘 나는 새를 보라
새를 보아라 꽃을 보아라
〈하늘 나는 새를 보라〉는 서양 찬송을 번역한 작품이라기보다, 한국 초기 개신교 선교사였던 프레더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 한국명 민로아)가 한국어로 창작한 성서 찬송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밀러는 한국 초기 찬송가의 번역과 편찬에 깊이 관여했으며, 그의 작품 가운데 여러 편이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이 성가는 1905년 무렵의 한국 찬송 전승에서 확인되며, 마태오복음 6장 25–34절과 루가복음 12장 22–31절의 말씀을 운문화한 것입니다. 영어 제목과 본문은 후대에 Edward Poitras가 번역한 것이므로, 한국어가 원문이고 영어가 번역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가리키며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가가 말하는 신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동보다 먼저 우리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으며, 우리의 가치가 소유와 성취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의 감사도 풍년이나 물질적 풍요만을 세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한 해를 살아갈 생명과 시간, 햇빛과 비, 노동할 힘과 서로를 돌볼 공동체까지 모두 하느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선율은 한국의 지휘자·작곡가 나영수의 SEE THE BIRDS입니다. Hymnary도 이 곡을 나영수의 선율로 기록하며 F장조, 9.7.8.8.8.7.8.7 운율로 분류합니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공개 자료에서는 정확한 작곡 연도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서구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한국인 작곡가의 음악으로 한국어 성서 찬송을 부른다는 점은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추수감사주일에 이 노래를 부르면 우리의 시선은 창고에 쌓인 수확에서 들판과 하늘로 다시 향합니다. 새와 꽃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을 붙들고 계심을 믿는 사람에게 감사는 불안 속에서 더 많이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며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383장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에서 그리스도교의 감사는 우리가 받은 물질을 헤아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부르고 가르치며 살아가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기억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추상적인 감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창조하시고, 먹이시고, 용서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시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이 나타난다고 증언합니다.
특히 감사는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받은 사랑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갈 때 성숙해집니다. 성찬례에서도 교회는 하느님께서 먼저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한 뒤, 자신과 세상을 다시 하느님께 맡깁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한다는 것은 사랑받은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의 말과 관계와 섬김 속에서 다시 흘러가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현재 공개 자료만으로는 이 곡의 구체적인 선율 구조나 각 절의 세부 표현을 검증하기 어려워 음악적 특징을 임의로 단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추수감사주일에 이 성가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감사의 중심을 ‘풍요’보다 더 깊은 곳, 곧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께 대한 응답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525장 넓은 들에 익은 곡식
밭을 보아라
넓은 들에 익은 곡식〈Far and Near the Fields Are Teeming〉은 미국 감리교 목사 제임스 오렌 톰프슨(James Oren Thompson, 1834–1917)이 쓴 선교찬송입니다. 가사는 1885년 The Epworth Hymnal에 출판되었으므로, 작사 연도 역시 1885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약 10년 뒤 James Bowman Overton Clemm이 선율을 붙였으며, 여러 찬송 자료에서 CLEMM, 1895로 기록됩니다.
황금빛으로 익은 곡식과 추수할 일꾼의 이미지만 보면 전형적인 추수감사 찬송처럼 들리지만, 본래 이 노래의 ‘추수’는 농작물보다 복음의 선교를 가리킵니다. 마태오복음 9장 37–38절에서 예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며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의 “밭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 추수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이 찬송의 직접적인 배경입니다. Hymnary와 현대 찬송집 역시 이 곡을 ‘추수와 감사’와 함께 ‘선교’의 성가로 분류합니다.
가사는 멀고 가까운 들판에 곡식이 익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추수의 주인께 일꾼을 보내 달라고 거듭 청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노래하는 사람 자신이 그 부름을 받습니다. “일꾼을 보내 주소서”라는 기도가 결국 “나도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소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CLEMM 선율은 8.7.8.7 운율과 후렴을 지닌 복음찬송 형식으로, 절마다 펼쳐지는 들판의 이미지가 후렴의 간절한 청원으로 모입니다.
이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에 이 성가를 부르는 의미는 특별합니다. 수확을 바라보며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받은 것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과 재능, 교회의 자원도 결국 복음과 사랑을 세상에 나누라고 맡겨진 것입니다. 감사의 열매는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일에 기꺼이 일꾼으로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528장 묘한 세상 주시고
온갖 완전한 선물은
묘한 세상 주시고〈For the Beauty of the Earth〉는 영국의 시인이자 교육자 폴리엇 샌드퍼드 피어포인트(Folliott S. Pierpoint, 1835–1917)가 1864년에 쓴 감사 찬송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처음부터 일반적인 ‘자연 찬송’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성찬을 위한 시와 찬송을 모은 《Lyra Eucharistica》에 ‘The Sacrifice of Praise’, 곧 ‘찬양의 제사’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원래 여덟 절은 땅과 하늘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사랑,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가장 큰 선물로 감사의 범위를 넓혀 갑니다.
가사의 중요한 특징은 자연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낮과 밤, 산과 골짜기, 나무와 꽃, 해와 달과 별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과 교회의 공동체까지 모두 하느님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창조세계에 대한 감사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내려온다”고 말하듯, 우리의 삶을 이루는 크고 작은 모든 선물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입니다.
선율 DIX는 독일 음악가 콘라트 코허(Conrad Kocher)가 1838년에 만든 더 긴 코랄 선율에서 유래합니다. William Henry Monk가 1861년 Hymns Ancient and Modern을 위해 이를 줄이고 다듬어 오늘날 익숙한 형태가 되었으며, 이후 피어포인트의 가사와도 긴밀히 결합되었습니다. 7.7.7.7.7.7의 균형 잡힌 선율은 감사의 대상을 하나씩 바라보게 하면서, 마지막 두 행에서 모든 감사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구조를 잘 받쳐 줍니다.
추수감사주일에 이 성가는 특히 성공회적인 깊이를 지닙니다. ‘성찬’을 뜻하는 Eucharistia 자체가 ‘감사’라는 뜻을 지니듯, 교회는 창조의 열매를 바라보며 감사할 뿐 아니라 빵과 포도주를 성찬의 식탁에 가져와 창조와 노동과 구원의 은총을 함께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 선물을 다시 찬양과 사랑과 섬김으로 돌려드리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이번 네 곡은 추수감사주일의 의미를 단계적으로 넓혀 줍니다. 336장은 새와 들꽃을 통해 생명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게 하고, 〈당신의 사랑을〉은 우리가 받은 모든 선물의 근원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525장은 감사받은 사람이 이제 추수의 일꾼으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고 부르며, 528장은 자연과 인간관계와 교회와 그리스도 자신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감사의 제사’ 안에 모읍니다.
따라서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풍요를 자랑하는 날이 아닙니다. 부족한 해에도 풍성한 해에도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기억하고, 우리가 받은 것을 자기 소유로 움켜쥐지 않으며 다시 이웃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는 날입니다. 감사는 받은 것을 세는 데서 시작하지만, 받은 것을 나누는 데서 완성됩니다. 교회가 이날 성찬의 식탁에 모일 때 우리의 수확과 노동, 기쁨과 어려움까지 모두 하느님께 드리며, 한 해 동안 우리를 먹이시고 이끄신 은총을 함께 찬양합니다.

